뇌과학

뇌는 어떻게 정보를 저장하고 삭제하는가?

nareun 2025. 4. 15. 03:18

우리는 매일 수많은 정보를 접합니다. 대화 내용, 뉴스 기사, 책에서 읽은 문장, 길거리 간판, 사람의 표정, 향기, 음악, 감정까지—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뇌로 들어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실제로 기억에 남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는 왜 어떤 정보는 오래 기억하고, 어떤 것은 금세 잊어버릴까요?

이 질문은 곧 뇌가 정보를 저장하고 삭제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물음과도 같습니다. 뇌는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는 저장소가 아니라, 끊임없이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필요한 정보만 남기는 능동적인 필터 시스템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기억이 뇌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며, 왜 어떤 기억은 사라지고 어떤 기억은 오래가는지, 그리고 기억력 향상을 위한 과학적 방법까지 뇌과학 관점에서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뇌는 어떻게 정보를 저장하고 삭제하는가?

기억의 기본 원리: 저장, 유지, 소멸의 3단계

기억은 단순히 ‘남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입력(encoding) → 저장(storage) → 인출(retrieval)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활동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뇌는 ‘정보의 가치’를 판단하여 어떤 것은 남기고, 어떤 것은 삭제합니다.

  1. 부호화(Encoding)
    외부에서 들어온 정보를 뇌가 해석 가능한 형태로 변환하는 단계입니다. 이 과정은 주의 집중과 감정, 맥락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 감정적으로 강렬한 경험은 더 쉽게 부호화됨
  2. 저장(Storage)
    정보를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옮기고 보존하는 단계입니다. 이 과정에서 해마(hippocampus)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반복, 수면, 관련성 부여 등이 저장률을 높임
  3. 인출(Retrieval)
    필요할 때 기억을 꺼내 쓰는 단계입니다. 연상, 감각 자극, 맥락 등이 인출을 도와줍니다.
    → 인출이 자주 될수록 기억은 더 견고해짐

기억을 저장하는 뇌의 구조들

기억은 뇌의 단일 기관에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위가 역할을 나눠 처리합니다. 각 영역은 서로 다른 종류의 기억을 담당합니다.

  • 해마(Hippocampus)
    장기 기억의 형성과 초기 저장을 담당합니다. 특히 사건 기억(episodic memory)과 공간 기억에 필수적입니다.
  •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
    작업 기억(working memory)과 단기 의사결정, 집중 유지 등에 관련된 영역으로, 정보를 일시적으로 저장하고 조작합니다.
  • 편도체(Amygdala)
    감정과 관련된 기억을 처리합니다. 공포, 분노, 슬픔 등 강렬한 감정이 포함된 기억은 편도체의 영향을 받습니다.
  • 측두엽, 두정엽, 후두엽
    감각적 정보(청각, 시각 등)를 바탕으로 다양한 종류의 기억을 저장하고 해석하는 데 관여합니다.

뇌는 어떻게 기억을 ‘삭제’하는가?

뇌는 컴퓨터처럼 ‘파일을 지우는’ 방식으로 기억을 삭제하지 않습니다. 대신,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보를 ‘사라지게’ 하거나 ‘비활성화’합니다.

  1. 시냅스 약화(Synaptic Weakening)
    사용하지 않는 기억 회로는 시냅스 연결이 약화되며, 결국 연결이 끊어집니다.
    → 자주 사용하지 않으면 점차 사라지는 이유입니다.
  2. 시냅스 가지치기(Synaptic Pruning)
    특히 유아기와 청소년기에는 불필요한 연결을 제거하고 효율적인 회로만 남기는 가지치기 작업이 활발히 일어납니다.
  3. 새로운 기억에 의한 덮어쓰기
    비슷한 정보가 반복해서 입력되면, 기존 기억은 모호해지거나 새로운 정보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4. 수면 중 정리
    수면은 기억의 정리에 필수적입니다. 뇌는 수면 중 당일 들어온 정보를 선별하고,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된 정보는 ‘버립니다.’

어떤 기억은 오래가고, 어떤 기억은 쉽게 사라질까?

기억의 지속성은 다음 요소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 감정의 강도: 감정이 강하게 동반된 경험은 편도체가 해마를 자극해 기억을 강화합니다.
    → 첫사랑, 큰 사고 등은 잊히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 반복과 복습: 반복된 자극은 시냅스를 강화시키며, 장기 기억으로 옮겨가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 연관성: 기존의 기억과 얼마나 잘 연결되느냐에 따라 기억의 정착률이 달라집니다.
    → 이미 알고 있는 정보와 관련된 새로운 정보는 더 오래 기억됩니다.
  • 주의 집중 상태: 정보가 입력될 때 집중하고 있었는지 여부는 기억의 질을 결정짓습니다.

기억력을 높이는 뇌 사용법

  1. 충분한 수면
    수면 중 해마는 뇌에 저장된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합니다. 7~8시간의 깊은 수면은 기억력 유지에 필수적입니다.
  2. 운동과 뇌 활성화
    유산소 운동은 BDNF(뇌유래신경영양인자) 분비를 증가시켜 시냅스 강화와 뉴런 생성을 촉진합니다.
  3. 학습 후 ‘쉼’ 주기기
    정보 입력 직후의 짧은 휴식은 기억 정리에 도움을 줍니다. 무작정 공부만 하는 것보다 효율이 높습니다.
  4. 이야기로 기억하기
    정보들을 스토리로 엮거나 이미지화하면 기억의 지속성이 높아집니다. 이를 ‘연상 기억법’이라고 합니다.
  5. 직접 써보기
    정보를 종이에 손으로 써보는 것은 시각·운동·인지 회로를 동시에 활성화하여 기억력을 높입니다.

뇌는 마치 편집자처럼 하루하루 쏟아지는 정보를 평가하고, 어떤 기억은 남기고 어떤 기억은 흘려보냅니다. 그것은 단순히 저장 공간 때문이 아니라, 생존과 효율을 위한 전략입니다.

기억은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뇌가 선택한 결과물입니다.
그 선택을 조금 더 의식하고, 중요한 것들을 더 오래 기억하고 싶다면, 지금 이 순간 뇌가 어떤 자극을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해 보세요.

기억은 뇌의 언어이며, 삶을 구성하는 조각입니다.
그리고 그 조각을 어떻게 쌓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